critics 2

정유정 개인전에 부쳐  
글. 김인선

 -김인선은 현재 윌링앤딜링 아트컨설팅 대표로서 전시공간을 운영하며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대안공간 루프와 국제갤러리 큐레이터, 대림미술관 학예실장, 인터알리아 아트디렉터 및 부산비엔날레(2000)와 광주비엔날레(2002)코디네이터,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2005)사무국장, 부산비엔날레(2012) 프로듀서 등을 맡았다.
2000년 부산광역시장상, 2002/2005년 문화부장관상, 2007년 국무총리상 수상-

피곤한 대도시의 일상 속에서 많은 이들이 전시장을 찾아다니며 미술 작품을 보는 이유는 자신이 살고 있는 반복적이고 뻔한 삶 속에서 항시 느끼는 것과 다른 특별한 감각을 깨워주는 타인의 특이한 어떤 것을 보는 즐거움이 있기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래서 일상적인 무언가를 특별한 시선으로 바라보도록 해 주는 작품을 만나게 되면 작가의 머릿속에서 어떻게 나와 다른 그런 생각이 가능한지 궁금해진다. 풍경을 다루는 많은 작가들 중에서 2013년 ‘동방의 요괴’ 심사 당시 만났던 정유정 작가의 작업에서의 가장 특이한 점은 화면에서 드러나는 독특한 질감이었다. 작가는 여러 사람들에게 화면 속에서 바람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도 한다. 물기를 거의 남기지 않는 건조한 채색 방식은 화면 위를 쓸고 지나간 붓의 한 오라기까지 그 흔적을 남기게 된다. 화면에서 보이는 건조함에서 들려올듯한 서걱거림처럼 이러한 붓질의 자국들은 풍경의 건조한 질감을 만들고 메마른 늦가을의 끝자락처럼 황량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때로는 마른 풀숲을 밟는 발자국 소리가 들릴 듯 하고, 때로는 횡한 바람소리가 공허하게 지나가는 듯 하다. 
화면을 더욱 황량하게 만드는 것은 화면 속의 인물이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작가는 인물을 넣지 않는 이유가 풍경 자체에 대한 시선을 강조하고자 하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특정 상황 혹은 인물의 배경이 되었던 풍경이라는 요소가 그 자체 그대로 인식되도록 하기 위하여 될 수 있으면 인물은 배제하거나 사건을 인식할 수 없는 정도의 아주 작은 부분으로서 드물게 등장케 하기도 한다. 이는 전통 동양화를 떠올리게도 하는데, 풍경 속에서의 인물을 자연의 일부로 파악하는 동양의 사상과도 통하는 지점이다. (실제로 작가는 동양화의 풍경화를 좋아한다고 말한다.) 정유정은 주변의 흔한 장소를 작업 대상으로 선택한다. 작품 <운동장>의 풍경을 선택할 당시의 그 장소는 한창 졸업식이 열리고 있는 학교였다. <그림자>는 동네의 흔한 골목길이다. 많은 이들이 오가는 장소에서 유독 작가의 눈길이 닿은 곳은 사람들 너머의 한적한 곳이다. 하나의 공간 속에서 특별히 외진 곳에 시선을 두고, 가장 중요한 일이 벌어진다고 생각되는 사건 혹은 대상보다는 그 이면을 굳이 화면 속으로 끌고 들어오는 것이다. 그래서 운동장을 묘사한 그 당시의 풍경 속은 사실 공허한 바람 소리가 맴돌기보다는 시끌벅적한 사람들의 웅성거림과 음악 소리 등등이 번잡하게 들려오고 있는 시간이었다. <그림자> 역시 한낮의 동네에서의 일상적인 모습이다. 이 그림 속 이미지는 집이라는 실체의 대상을 비껴가 바닥의 그림자를 통하여 대상의 특징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화면 전체를 차지하는 장면은 땅바닥이며 실제 건물은 보이지 않는다.  

이처럼 뭔가 다른 이면의 특징을 바라보고자 하는 태도는 정유정 작가의 개인적인 성격이나 경험에서 나오는 성향인 듯 보인다. 어릴 때부터-대부분 우리는 그렇게 자라왔지만, 그리고 개인적으로 각자의 경험이 다 다르겠지만- 자신의 감정과 상관없이 정해진 규칙에 얽매이고 이를 지키려고 노력하는 동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유로운 감성을 박탈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유독 강했다고 한다. 뭔가에 얽매이고 전전긍긍하고 억지로 해야만 하는 모종의 규율의 압박 속에서 작가는 어느 순간부터 이를 털어내기 시작했던 듯하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자유로움에 대한 갈망이 무디어 가고 오히려 스스로를 구속하는 장치를 만들곤 하는 아이러니한 우리의 삶 속에서 이제 막 활동을 시작한 어린 작가는 모종의 해방감을 맛보기 시작하고 있다고 한다. 이제야 막 반드시 정해진 것만이 다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아 가면서 작가는 이면의 어떤 것을 바라보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일탈을 갈구하는 모종의 위안을 자연 속에서 받고 있다. 풍경에서 받는 위안은 시간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아무리 깊은 감정이라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감각이 서서히 사라지듯 항상 그 자리에 존재하면서 조용히 변해가고 있는 풍경이 작가에게는 자신을 넓은 마음으로 감싸주고 있는 위안이 되는 존재와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작가는 풍경 자체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세월을 지내며 나이를 먹어가는 유기적인 생명체처럼 느껴진다고 말한다. 오랜 세월동안 산전수전 다 겪은 노인처럼 결국엔 우리의 버둥거림의 이면에서 어차피 고요함을 다시 경험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작가만의 현자의 모습인 주변 풍경을 그리고자 하는 것이다. 작가는 그러한 풍경이 가지고 있는 기억과 시간의 흔적을 화면 속에 표현하고자 하였다. 

그래서인지 정유정 작가의 풍경화는 아련해 보이기도 하다. 원하는 풍경을 사진으로 기록하여 이를 캔버스로 옮기는데 이 장면을 자세히 묘사하지는 않는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한 순간을 작가와 공유하고 있는 그 순간의 풍경이 사진 속에 있지만 붓을 들고 이를 그려나가는 순간에도 그 곳은 세월을 맞이하고 이에 반응하며 천천히 변해가고 있다. 작가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주름살이 늘어가듯, 이 풍경들이 품고 있는 세월의 흔적을 아주 빠른 붓놀림으로 기록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작가의 작업은 초기에는 좀 더 날카롭고 보다 건조하고 많은 색채들이 겹쳐지면서 다소 무거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채도가 낮으면서 여러 가지 색채가 겹쳐진 화면은 마치 흐린 날씨의 불길한 공기를 드러내듯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도 드러냈다. 이것은 시각 뿐 아닌 복합적인 감각을 깨운다. 화면 질감의 건조함에서 드러나는 질감을 느끼도록 하는 촉각, 그 속에서 들릴 것 같은 사각거리는 청각, 때로는 불길해 보일 정도로 습한 공기의 느낌들이 동시에 나타나면서 보는 이를 삭막한 풍경의 감각 속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그것은 작가가 바라보았던 그 당시의 풍경을 시각적으로 전달하는 동시에 그 때의 감흥과 심정 등 작가의 감성을 충분히 담기 위하여 온갖 감각을 동원하여 애쓴 흔적의 기록이기도 하다. 

작가의 개인전을 3주 정도 앞두고 방문한 스튜디오에서 본 최근의 작업은 그 기법은 같았으나 보다 푹신하고 부드러운 질감을 보여주고 있었다. 색채는 훨씬 단순하면서도 산뜻하고, 선택된 풍경은 사람이 지나다니지 않는 고즈넉한 곳이었다. 그것은 또 색달랐다. 붓자국에서 나온 색채들을 들여다 보니 풍경이라는 특정 장소를 대상으로 그린 그림을 본다기 보다는 작가의 변화된 마음을 엿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사진을 찍을 때의 심정은 더 이상 불안해 보이지 않았고, 이것을 화폭에 담을 때에는 왠지 보다 가볍고 수월한 마음으로 그렸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화면 위의 색채들이 캔버스의 질감과 표면에 동화되면서 하나의 레이어로 된 색채평면으로 드러나고 있다. 즉 다양한 색채들이 겹쳐지면서 구현되었던 밀도감에서 표현되었던 무게감이 사라지고 마치 흔적만 남겨진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는 듯한 화면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작가는 그러한 변화에 대해 스스로 인식하고 있으나 이에 대해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고 있다. 그의 그림을 바라보는 나 또한 판단을 유보하고 있다. 확실한 것은 이 작가의 작업이 매우 예민하고 민감하게 스스로의 감정 상태를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며 그 때문에 이 작가의 작업 시기가 중요해 보인다. 일반적으로 작가의 초기 작업에서는 종종 작가의 심리가 솔직하게 그대로 투영되곤 한다. 그 감성이 작품으로서 제작되는 동안 드러나는 화면이 사실은 자신을 반영하고 자신을 기록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젊은 작가로서 만끽하는 감정에 대한 충실한 자기 표현을 작가도 관객도 충분히 즐길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