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cs 3

- 이름 없는 풍경 바라보기 -
정유정 개인전에 부쳐


주성열(예술철학 / 미술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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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얀 과거 바라보기

정유정의 그림에 대한 첫 인상은 작가의 학부생시절부터 출발하는데, 그때 이미 필자는 작품에 대한 인상뿐만 아니라 작품이 지닌 미적 의미에 경도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에도 정유정이 제시한 풍경은 현실에서는 간혹 만날 수 있을까말까 한 기이하고 낯선 상황을 재현하고 있었는데, 그러면서도 동시대 즉, 그 때 그 자리이면서 여전히 현장성을 간직한 현재의 자리를 그린다고 증언했었다. 이를테면 자신이 살던 골목길을 산책하다 만난 이미지 중 정직하게 남아있는 증거를 ‘하얀 모노크롬’ 으로 옮겨놓지만 감상자는 현실적 공간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이다. 작가는 주변 풍경에서 본질을 직관하고 일상에서 묻어나던 상념을 털어내어 미의 가치보다는 미적 리듬을 위해 순수형식으로 풀어냈을 것이다. 그러므로 모호하거나 낯선 그의 그림을 이해하려면 상투적인 방식이나 일상적인 관습으로는 불가능하다. 그 낯선 출발점에 서 있는 화가 정유정의 이야기는 기예적인 기법으로 잘 만들어진 그림들 속에서 특히 돋보인다. 

빈 운동장, 빈 터, 빈 들 같은, 퇴적된 시간으로 희미해지고 쉽게 볼 수 없이 색 바래고 흐릿해진 하얀 과거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그는 색 바랜 풍경에 대한 관점과 의식을 재구조화하기 바라며 그것을 재현한다. 풍경도 역사처럼 과거와의 끊임없는 소통이며 화해일 것이다. 텍스트만이 소통이 아닌 것처럼 화려한 물감을 발라야만 그림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작가가 제시하는 집단의 기억을 재조정하고 안내하는 그림은 전체적으로 흐릿하기에 선형적인 방식보다는 공간적으로 지각되는 촉각적 이미지로 읽어야 한다. 

하이데거는 세계의 전이가 예술의 본질임을, 아무도 가보지 못한 길이 해석되어 본모습을 드러냄을 예술적 진리로 규정하고 있지만, 작가는 이런 존재의 드러냄의 외침보다는 세계 속에 스며있는 의미에 주목한다. 이는 감각적 물성보다는 지각의 순수성으로 다가서야만 볼 수 있는 세계의 참 모습이다. 명료하지도 않고 무표정의 무덤덤한 풍경이지만 세계에 대한 원초적인 감각의 진면목이며 근원적인 일상을 양육한다. 

작가 자신의 집을 삼인칭으로 대상화 한 2011년 작품 <그림자>는 오랫동안 자신이 거주하던 집의 형상을 그림자 실루엣으로 제시하여 공간적 이미지로 읽어야 하는 김유정 작업의 요체를 보여준다. 만약 집이 구체적으로 재현되었다면 정보를 확보하는 순간 더 이상 대상에 대한 상징도 의미도 바랄 수 없게 되므로 낡고 희미한 그림자에서 발견되는 삶의 증거들이 그림자를 통해 간접 방식으로 투영된 것이다. 

2. 그냥 그 곳 풍경

그는 어딘지 모를 곳으로 되돌아가려는 욕망으로 시간을 연장하거나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상생의 미래를 바라본다. 그러므로 그의 그림이 황량하거나 흐릿하게 느껴지다가도 늘 행복한 약속과 예감으로 가득해짐을 부인할 수 없다. 풍경은 원근법이 아닌 수면의 깊이처럼 투영되어 화면 안으로 빨려 들어가게 한다. 육체의 기억은 공간과 결합되어 무의식에서 침잠된 참모습을 재생하는 의미가 있으므로 일상의 자유롭고 확장된 의식에서 비롯된 순결하고 비범한 가치와 연결되었으리란 믿음이 생긴다. 사물에는 생각하는 것보다 엄청난 어둠이 있을 거라는 추정이 그의 풍경화가 백색의 모노크롬인 이유일 것이다. 그에게 배제의 형식이 매혹의 형식이기도 하다. 
 
많은 풀들이 존재하지만 풀을 분별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약초이고 독초이고 그렇지 않다면 무성한 풀일 뿐이다. 그의 풍경에서도 풀은 숲속에 존재하는 풀처럼 그냥 일상의 풍경이다. 분별하고 이해를 논하기를 습관처럼 하다 보니 언제부턴가 회화에서 ‘그냥 풍경’은 사라졌다. 작가는 감상자에게 그 곳 도시 풍경의 색 바랜 과거를 보는 법을 제시하고 그 하얀 과거가 지금 이 자리에도 존재하고 있음을 일깨운다. 생활을 묶은 도시공간에서의 삶이 꿈꾸는 도시 밖의 공간을 현실을 초월하는 ‘낯설게 하기’ 풍경그림을 통해 보여준다. 작가에겐 가장 아름다움 풍경은 풍경으로 멀어졌을 때 보인다. 비현실처럼 보이는 폐허나 소외된 공간은 인간의 유한성, 자연의 무한성을 암시하기도 하고, 그림에서 미래에 일어날 사건은 없을지라도 상생의 환희와 희망이 있음을 증언한다. 

그림 속 풍경마다 기원을 부정하는 것들이 분주하게 자리하다가 오염을 제거하고 난 끝에는 투명하고 성스러운 현존재의 기억들이 남는다. 새벽의 공기가 지나간 자리에 아침 햇살이 자리하고 안개 걷힌 호숫가에 청명한 공기가 가득하다. 그리고 도시 내부에서 도시의 외부를 꿈꾸는 근원회귀의 욕망을 그림은 조용히 말한다. 불순해진 도시 풍경은 사람의 마음을 할퀴어 생채기를 내기도 한다. 태아의 기억을 모르는 것처럼 인간이 바라던 원초적인 풍경 또한 아련한 기억으로도 남기기 어려운 것이다. 정유정의 그림이 흐릿하지만 깊어지는 것은 현실의 무게나 불순함의 압박을 견디고 나온 명료하거나 충분하지 않은 ‘그냥 그 곳 풍경’이라는 결과로부터다.


3. 소프트 리얼리즘, 증발하는 풍경

아무런 정취도 없는 듯 한 정유정의 이미지의 세계를 발터 벤야민의 말을 빌어 ‘인간과 세계 사이의 유익한 소외’라 간주해 본다. 그림의 완성을 미래가 아니라 그림이 그려지는 최초의 단계 혹은 과거에 두고 의식과 세계가 맺는 일순간의 확보된 현실만을 거두고, 이미지로 표상하거나 언어로 분절할 수 없는 우리 내면의 어두운 심리적 현실인 실재계 이전의 상징계를 재현하는 낯설고 황량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표현적 사진과는 달리 정서적으로 건조하고 미적효과로서는 냉담하여 속빈 강정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하이데거의 언급처럼 그것은 존재가 출현하는 조건이기도 하며 존재의 비밀이 열리는 경이로운 순간이기도 하다.

정유정의 작품은 건조한 채색이든 부드러운 선묘 채색이든 숭고함이나 아름다운 ‘그림 같은 풍경’(picturesque)과는 사뭇 다른 ‘소프트 리얼리즘’(soft realism)의 형식을 택하고 있다. 꿈에서 본 듯한 풍경의 흐릿함이나 왜곡된 공간은 사라짐의 공간이자 그냥 풍경으로 이동하는 공간으로, 이성적이기보다는 시각적이며 촉각적인 기억을 회화적으로 남긴 것이다. 내일이면 어제가 될 오늘이 흘러가는 과정, 현재의 물성의 단단함이 대기 속으로 사라지는 과정이다. 유미하지 않은 소프트한 풍경 속에서 문득 현실의 차가운 냉소를 제시하는 무표정성의 푸석거림이라는 ‘데드팬’(dead fan)의 의미를 구현하고 있음을 본다.
 
다가오는 미세한 세계를 끌어 모으면 투명한 바람이 된다. 단단한 것이 무엇이 있으랴. 아직 현실이 되지 못한 풍경으로 남기를 바라는 작가의 마음이 투영된 이미지들은 넓게 가라 앉아 고적하여 낮고 무겁지만 곧 리드미컬하게 증발할 것처럼 보인다. 증기로 사라져